중대재해처벌법 시행, 어업 현장과 괴리감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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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대재해처벌법 시행, 어업 현장과 괴리감 크다
  • 탁희업 기자
  • 승인 2024.02.19 09:2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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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선이 바다로 떠나는 순간부터 모든 것들은 선장의 지휘하에 움직이게 된다. 높은 파도는 물론 투망과 양망, 기상에 따라 항·포구로 돌아올지 여부도 선장의 명령에 달렸다. 어선의 어획 실적은 물론 어선과 어선원들의 안전과 생명까지도 선장의 말 한마디로 결정될 수 있다. 기상 악화로 주의보가 내려질 경우 위험을 무릅쓰고 조업을 이어갈지, 일시적인 피항에 그칠지도 선장의 말 한마디에 달려 있다.

하지만 이제는 선장의 말보다는 법이 우선하게 됐다. 오랜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태풍과 폭풍을 견디며 어획량을 늘리는 선장의 유능함보다는 처벌을 모면하거나 법을 준수하는 일이 우선이 되게 됐다. 유류비, 자재비 등의 상승과 자원 감소, 인력 부족 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어업인들은 언제 바다로 나가야 될지 모를 지경이다.

지난 1월 27일 중대재해처벌법이 5인 이상 사업장으로 확대 적용되면서 사정이 달라지게 됐다.
중대재해처벌법은 산업 현장의 사망 사고 등 중대재해가 발생할 경우 그 책임을 더욱 엄중하게 묻는 제도다. 1월 27일 법이 시행돼 5인 이상 어선어업은 물론 양식장 등도 대상에 포함돼 사망 사고 등 중대재해가 발생하면 1년 이상 징역형 처벌을 받게 된다.

선장은 안전 조업을 위한 어선의 기계 장비나 어선원 안전을 챙겨 어획고를 높이는데 집중했지만 이제는 위해요인이나 위험요소를 파악해 개선해야 한다. 언제 폭풍이 몰아치고 태풍을 만날지 수시로 변화하는 바다의 위험요인을 개선하지 않는다면 처벌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재해 예방능력을 갖추라는 것과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킬 목적의 법이 오히려 현장에서 묵묵히 일상을 이어가는 국민들을 죄인으로 만들 상황이다.

“시행 이후 멈추는 것은 원칙에 어긋난다”, “5인 이상 규모의 모든 사업장 적용으로 소상공인이 어려울 수 있다는 지적에 과장된 측면이 있다”는 정치권의 인식이 오히려 어업인이 배를 버리는 상황을 초래할지도 모른다.

이번에 시행된 중대재해처벌법의 가장 큰 문제는 어업인들이 법 내용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으며, 특히 법 적용이 어업 현장과 괴리감이 크다는 것이다.

전국 조합장을 비롯한 수산업경영인과 수산 관련단체는 50인 미만 사업장으로 확대하는 것을 2년간 유예해달라고 정부와 국회 등에 요구해왔다. 중소기업중앙회도 법 시행 7개월을 앞둔 지난해 6월 ‘중대재해처벌법 평가 및 안전관리 실태 조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40.8%가 법 준수 불가능이라며 적용시기를 최소 2년간 유예해달라고 요청했다.

수협중앙회도 최근 50인 미만 사업장 적용 확대에 대해 전국 100만여 수산·어업인이 예비 범법자로 전락할 위기에 처하게 됐다며 2년간 유예가 절실하다고 밝혔다. 가장 큰 이유가 어업 현장에서 법 시행에 대해 잘 알지 못하며 지도와 계도에 시간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여느 산업보다 위험노출도가 높은 바다라는 현장에서 위해요인이나 위험요소를 어디까지 적용해야 하며, 승선하지 않고 선장을 고용한 어선주는 노동자인지 사용자인지 구분도 모호하다. 어선주가 선장을 겸하며 5명의 어선원과 함께 조업하는 가족 형태 어선도 처벌 대상이라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는 어선주가 대부분이다. 어선주를 겸하는 선장이 안전보건 관리체계 구축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분명치 않다.

어업 현장의 상황을 감안하지 못한 점도 법 적용 반대 이유 중 하나다. 거친 파도와 풍랑 속에서도 어업 활동이 가능하지만 안전관리를 했느냐는 법의 잣대를 들이댈 경우 처벌을 피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바다라는 특수상황을 고려하지 않는 법이 적용될 경우 어업인들은 어선을 버릴 수밖에 없다. 수산업을 포기하라는 것과 마찬가지다.

계절이나 날씨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바다는 아무리 능숙하고 경험 많은 어업인이라도 위험에 노출될 수 있다. 따라서 현장 종사자들은 물론 어선주들의 생명과 안전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함에 없다. 사회의 가장 기본적 가치인 생명과 안전 존중이라는 기본도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 자연재해로부터의 국민 보호는 말할 것도 없고 일상 생활과 일하는 현장에서의 안전 또한 국가와 정부의 매우 중요한 책무이기도 하다.

하지만 산업 현장의 상황을 감안하지 않은 일률적인 법 적용은 산업의 건전성과 안전성을 오히려 해칠 수도 있다. 의무 사항이 구체적이지 않고 모호해 현장에서 많은 혼선이 발생한다면 오히려 안전을 저해할 우려가 높다. 특히 전문인력과 많은 비용이 요구되는 생명과 안전을 위한 일이라면 철저한 준비와 지원대책이 먼저 마련돼야 한다. 강력한 처벌 조항으로 어업인들이 폐업하거나 도산해 배를 포기하는 일은 발생하지 않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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