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어업 유산의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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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어업 유산의 가치
  • 한국수산경제
  • 승인 2020.04.27 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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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식량의 가치 측면-양식어업

우리나라 양식업은 광복 직후부터 김 양식과 굴 양식에서 출발했다. 양식업도 일제강점기 수산자원의 수탈을 목적으로 시작된 시험양식에서 출발했다. 일제강점기 이후 1970년대까지는 일본 수출을 목적으로, 그리고 1980년대에는 종묘 생산과 기술 개발 등을 기반으로 다양한 어패류가 대량 생산됐다. 

갯벌을 끼고 있는 어촌이 호황을 누리던 시절은 김, 미역, 톳 등 해조류들이 전량 일본으로 수출돼 시세가 좋았던 시절이다. 1970년대 말 전남 완도의 어느 섬에서는 초등학교 선생으로 발령을 받았다가 그 일을 그만두고 김 양식을 했다는 사람도 있다. 지금의 김값이나 1970년대 말 김값이 똑같다고 하니 당시의 김 시세를 가늠할 만하다. 당시 완도를 비롯해 김 양식을 했던 어촌에는 “개들도 만 원짜리 지폐를 물고 다녔다”고 전한다.

갯벌에서 이뤄지는 양식으로는 김 양식과 굴 양식이 으뜸이다. 김 양식은 우리나라 서남해안, 제주도와 일본, 중국 등에 분포돼 있으며 17세기부터 김 채취가 시작됐다. 역사 기록에는 1434년 간행된 <경상남도지리지>에 김이 토산품으로 기록돼 있다. 400여 년 전에 나온 <동국여지승람>에서도 전남 광양군 토산품으로 김이 등장하고 있다. 상품을 목적으로 한 김 양식은 1920년대 말 일본의 개량 양식법이 보급되면서부터다. 일제강점기에 김 양식의 주산지는 완도, 고흥, 장흥, 광양, 여수, 진도, 무안 등 남해안 중심 지역이었다. 

광복 이후에도 해조류 양식어업의 중심은 전남이었다. 일본 수출 전망이 좋았기 때문에 어업인들이 많이 뛰어들어 김 양식은 해마다 증가 추세를 보였다. 1960년대의 김 수출은 수협중앙회에서 모두 수집해 공동판매했다. 특히 김은 일본시장에 의존하고 있는 관계로 일본의 김 수입정책은 국내 김 판매가격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60년대 후반 일본이 자국 생산자 보호 차원에서 한국산 김 수입을 적극 억제하는 정책을 취하자 국내 김 수출가격이 크게 하락해 김 파동을 겪기도 했다. 

1970년대 이후부터 1980년대까지 김 양식은 매우 호황을 누렸으며, 완도의 경우 김 양식이 지역경제를 지탱하는 중요한 소득원이 됐다. 하지만 김 양식은 일본의 수입규제로 위기를 맞았고 오랫동안 양식을 반복한 탓에 어장 오염과 노후화가 심각해졌다. 김 양식을 계속하려는 어업인들은 새로운 어장을 찾아서 서해안을 따라 무안, 함평을 거쳐 곰소만, 새만금, 비인만, 가로림만, 경기만 갯벌로 이동했다.

굴은 <신증동국여지승람>과 <전어지>, <자산어보>에 기록돼 있으며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강원도를 제외한 7도의 토산물로 기록돼 있다. 굴은 김과 함께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양식으로 여러 패총에서 굴 껍데기가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선사시대에도 식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 굴 양식은 1923년 경남 가덕도 연안 간석지에 바닥 양식법을 시작으로 충청남도, 전라남도, 평안도 등 각 도별 수산시험을 거쳐 연안 간석지 중 적지를 선정해 시험 양식을 했다.

재래식 양식법으로는 갯벌에 돌을 놓아 종패가 붙게 하는 투석식와 소나무 가지를 물속에 담가놓아 종패를 붙이는 송지식이 있었고, 일부 지역에서는 건흥식과 돌 또는 패각을 뿌리는 바닥식 양식도 시행했다. 이러한 재래식 굴 양식 방법은 1936년 바다 속에 새끼줄을 이용해 시작됐는데, 오늘날 수하식의 전신이라 할 수 있다.

광복 이후 1950년대까지는 투석식과 송지식을 위주로 한 재래식 굴 양식의 시대였다. 수하식 굴 양식은 1959년부터 보급돼 1960년대 널리 확산됐다. 이보다 앞서 1940년대 후반 전남에서는 간이 수하식(걸대식) 양식이 이용됐지만, 뗏목 수하식 및 연승 수하식 굴 양식법의 개발과 보급에 의해 굴 양식사에 새로운 전환점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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