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 시를 만나다] 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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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시를 만나다] 문어
  • 한국수산경제
  • 승인 2020.03.02 0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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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어

고영민

문어 한 마리를 사가지고
어머니를 찾아간다
가자, 문어야
엉금엉금 문어가 기어온다
시외버스를 타고 등받이를 뒤로 젖힌 채 누워
나와 문어는 어머니에게로 간다
내가 어쩌다 이 아랫녘,
호미(虎尾)의 바닷가까지 쫓겨 내려와 살게 되고
어머니는 고향도 아닌 첩첩 두메에
늙은 몸을 두게 되었나니
나와 문어는 휴게소에 들러 오줌을 누고 요기를 하고
다시 버스에 올라 어머니에게로 간다
문어는 옆에 앉아 내내 꾸벅꾸벅 존다
실컷 자거라, 문어야
바다 꿈을 꾸어라
이제 너는 돌아가기엔 너무 멀리 와버렸고
차고 깊은 바다가 아닌
큰 솥에 넣어 삶아져야 할 터
솥뚜껑 사이 너는 필사적으로 다리를 내밀 테지
그 위에 올라타 나는 힘껏 누를 테고
천천히 네가 솥 안으로 주저앉을 때
솥뚜껑 위의 나도 함께 조금씩 내려앉겠지
버스는 꽃 피는 이 마을 저 마을을 돌아 내달리고
축축한 문어의 어깨에 기대어
나도 함께 꾸벅꾸벅 존다
가자, 문어야
펄펄 끓는 내 늙은 어머니에게로 

 

※ 고영민 작가는…
충남 서산 출생. 2002년 <문학사상> 등단. 시집 <악어>, <공손한 손> 등. 박재삼문학상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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