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경제발전의 초석 쌓은 원양어업 6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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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경제발전의 초석 쌓은 원양어업 60년
  • 장승범
  • 승인 2017.06.29 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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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양, 국내 전체 어류 생산량의 41.0%


 

올해는 우리나라 원양어업이 시작된 지 만 60주년이 되는 해이다.

우리나라 원양어업은 제동산업(주)(사장 심상준) 소속 시험조사선인 지남호가 1957년 6월 29일 부산항을 출항, 인도양에서 참치연승 시험조업을 한 것이 시작이다. 올해로써 꼭 60년 전의 일이다.

27명의 선원을 태운 지남호가 인도양을 향해 부산항을 떠난 것을 시작으로 우리나라 원양어업은 본격적으로 태평양, 인도양, 대서양, 남빙양 등 전 세계 어장으로 진출해 외화를 벌어들여 우리나라 산업근대화의 밑거름이 됐다.

원양어업 진출 60주년을 맞아 잊혀진 영웅들인 이들에 대한 재조명과 재평가 작업이 필요하다는 여론이 최근 일고 있다.

지난해 명지대 한국학연구소를 필두로 우리나라 경제 성장의 일등공신이었던 원양어업의 시대적 역할에 대한 학술적 연구가 이뤄지기 시작했다.

최근에는 원양어선들의 선적항이자 우리나라 원양어업의 모항인 부산광역시가 원양어업 스토리텔링 작업에 적극 나서는 등 지자체까지 원양어업 역사에 대한 재조명 작업을 활발히 전개하고 있다.

1960∼1970년대 원양 산업 역군들이 벌어들인 외화는 약 20억 달러
원양어업과 함께 우리나라 경제발전에 한몫을 했던 파독 광부 및 간호사들의 역할이 사회적 관심을 끌게 된 것은 과거사위원회가 지난 2007년부터 2008년 8월까지 진실 규명 차원에서 ‘파독 광부 간호사의 한국 경제 발전에 대한 기여의 건’을 조사 발표하면서였다. 인기리에 상영되었던 영화 국제시장도 한몫을 했다.
과거사위원회는 당시 ‘1960-1970년대 한국의 광부, 간호사들이 독일에서 파견 근로자로 일하면서 임금의 일부를 고국으로 송금함으로써 한국의 경제발전에 직접적으로 기여했다’고 결정했다. 과거사위원회는‘파독 광부·간호사들이 보낸 송금액은 1965년부터 1975년까지 총 1억153만 달러로 그 시절 총 수출액 대비 각각 1.6%(1965년), 1.9%(1966년), 1.8%(1967년)로 한국의 경제발전에 상당히 기여한 것으로 평가된다’고 밝혔다.(1971년의 경우 총 수출액의 0.6% 차지하지만 원양 산업 역군들이 벌어들인 외화는 지남호 시험조업(1957년) 후 1958년부터 1979년까지 약 20억 달러(19억9289만8000달러)로 파독 근로자들의 외화획득 규모에 비해 20배 가까이 많다. 당시 우리나라 총수출액의 5%(1971년 기준) 안팎을 차지할 만큼 금액면에서 그 기여도는 훨씬 컸다. 파독 광부 간호사들의 송금 기간(1965년∼1975년)과 같은 기간만 놓고 비교해도 원양어업으로 인한 외화획득 금액은 6억6346만6000 달러로 6배가 넘는다.
물론 외화 벌이 규모만으로 파독 근로자들이나 중동 근로자들과 우리 원양어업인들의 역할을 단순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과거 우리나라 원양어업이 오늘날 자동차산업처럼 당시로서는 우리나라의 가장 중요한 블루칩 산업이었던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국민 식량 보급원으로서 막중한 사명 수행, 국민 소득 향상 기여
1960년대 초기 한국의 경제 상황은 참혹한 수준으로 6.25 전쟁 통에 그나마 있었던 산업시설마저 붕괴되었고 경제 성장의 기반을 형성할 아무 것도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나라 원양어선들은 해외로 눈을 돌려 외교 관계조차 수립되지 않은 나라까지 진출해 오대양을 누비며 우리 국민들의 먹거리 제공은 물론 귀중한 달러 벌이를 통해 국가 경제 발전의 초석을 쌓았다.
원양어업으로 잡은 참치, 명태, 오징어, 꽁치, 민어 등은 우리 국민이 선호하는 대중적 생선으로 보리고개, 경제개발로 대표되는 그 당시 우리 국민들의 식탁을 더욱 풍성하게 했다.
원양어획물 수출은 해외 자원을 바탕으로 한 것이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수출품에 수반되는 원자재 비용이 전혀 없어 외화 가득률이 100%에 달했다. 단 1 달러의 외화도 소중했던 1960년대 한국 경제상황에 비춰 볼 때 국제수지 개선은 물론 국민소득 향상 등 나라 경제발전에 결정적 기여를 했던 것이다.

수많은 선원들 대양의 거친 파도와 사투 벌이다 희생
원양어업을 통한 외화획득은 우리 원양어선원들의 피땀으로 이뤄진 결실이며 그 과정에서 수많은 선원들의 희생이 뒤따랐다.
파독광부들이 막장에서 힘든 노동으로 벌어들인 돈을 국내로 송금한 것처럼 우리 원양어선을 탔던 수많은 선원들 역시 대양의 거친 파도와 사투를 벌이며 힘들게 물고기를 잡았다.
해외 어장에서 조업을 하다 순직한 원양선원들이 안장된 해외 원양선원묘지는 현재 스페인 라스팔마스(104기), 테네리페(18기), 사모아(89기), 수리남(31기) 타이티(14기), 피지(16기), 앙골라(16기), 세네갈(13기) 등 모두 8개소로 301기의 영령이 모셔져 있다.
한국원양산업협회는 지난 2002년부터 정부 예산을 지원받아 해외에 산재한 원양선원묘지들을 발굴 정비 보수작업을 벌이고 지금까지 관리해오고 있다.
하지만 이들 8개 해외 원양선원묘지에 모셔진 분들 외에도 고국으로 이송돼 안장된 분들, 그리고 아직 미처 파악되지 못한 묘역들도 더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실제 순직 선원들의 수는 이보다 훨씬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원양산업협회는 해양수산부로부터 예산을 지원받아 지난 2014년부터 이들 순직 선원들의 유해를 한국으로 모셔오는 사업을 적극 지원하고 있다. 유가족들이 해외에 있는 묘지를 한국으로 이장하길 원하는 경우 유해를 국내로 모셔오는 절차 대행은 물론 유해를 모셔오는데 필요한 제반 경비까지 정부 예산으로 지원하고 있다.

해외 자원 개발, 국민 수산 식량 공급(전체 어류 공급의 41% 담당)
산업근대화 출발 당시 걸음마를 시작한 우리 원양어업은 먼 바다 타국 해역에서 거친 바다와 싸우며 1960∼1970년대는 물론 현재까지도 우리국민들에게 소중한 수산 식량을 공급하며 국민생활에 보탬이 되고 있다.
1957년 지남호 시험조업으로 시작된 우리나라 원양어업은 1958년 원양어획물 생산량이 257톤에 불과했으나 그 이후 급속히 증가해 1975년 56만5593톤으로 50만 톤을 돌파했다. 1992년도에는 최고치인 102만3926톤을 기록하는 등 우리 국민들에게 부족한 수산 단백질을 지속적으로 공급해 왔다.
그동안 연안국들의 규제 강화와 입어료 상승 등 조업 여건 악화로 원양어선 수가 대폭 감소하면서 원양어업 생산량은 전성기 때보다 다소 줄어들긴 했지만 지금도 한해 70여 만 톤(합작생산량 포함)에 이르고 있다.
국내 전체 어류 생산량의 41.0%(2015년 기준)를 원양어류가 차지할 만큼 원양어업은 오늘날에도 없어서는 안될 소중한 수산식량 산업이다. 연근해 어업과 더불어 지금도 원양어업은 우리나라 수산업을 대표하는 양대 축을 형성하고 있다.

1957년 인도양 참치연승 조업으로 시작된 우리 원양어업은 그 이후 세계 5대양으로 활동 무대를 넓혔다. 1958년 어선 1척, 해외기지수 1개소에 불과하던 원양어업세력은 최고치의 경우 1977년 어선척수가 850척까지 늘었으며 1990년 해외기지수도 28개까지 증가하기도 했다.

이런 과정에서 우리 원양어업인들은 조업을 끝낸 뒤 어선에서 내려 연안국 현지에 잔류하기도 했는데 스페인 라스팔마스를 비롯, 남태평양 사모아, 아프리카 연안국 등 세계 각처에 뿌리를 내려 재외 한인 사회 형성에 크게 기여했다.

우리 원양어업이 활동영역을 넓힌 방식 중 대표적인 사례로는 해외투자와 해외 이민사업 등을 들 수 있다.

우리나라 수산업(원양어업)의 최초의 해외투자는 제동산업(주)가 1970년 한국은행의 해외투자 허가를 받아 파나마 현지법인을 설립하면서 시작됐다. 그 이후 우리 원양어업은 다양한 해외투자를 통해 해외 진출을 모색해 왔다.

해외 어업이민사업의 경우 1979년 한성기업(주)의 아르헨티나 어업이민사업이 그 대표적 사례로 우리국민의 활동시야를 해외로 넓히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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