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천년의 문화가 살아있는 도시...경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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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천년의 문화가 살아있는 도시...경주
  • 이지연
  • 승인 2004.06.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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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전체가 노천 박물관이라고 불릴 만큼 신라천년의 영화가 고스란히 보존돼 있는 경주는 유네스코에서 지정한 세계적인 역사도시로 세계각지에서 찾아오는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 관광과 휴식을 겸할 수 있는 최적의 여행지다.
신라인의 얼이 깃든 문화재가 곳곳에 산재해 문화유산의 본고장이라 불리는 경주는 우리가 중고교 시절 한번쯤은 수학여행으로 다녀올 만큼 역사적으로, 수학여행의 즐거운 추억으로 우리에게 의미 있는 곳이다. 이른 새벽 구슬땀 흘려가며 정상에 올라 일출을 봤던 토함산 석굴암과 불국사, 다보탑, 석가탑, 무열왕릉, 천마총, 포석정지 등 한번쯤 들어본 국보급 문화재도 많지만 이들에 가려 지금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던 경주의 숨은 문화재를 찾아 떠나보려 한다.

문무대왕릉

봉길리 앞바다에 일명 대왕암이라 불리는 바위섬이 하나 있는데, 이곳이 바로 서기 668년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676년 삼국통일을 이룩한 신라 제 30대 왕 문무왕(文武王)의 수중릉이다.
죽어서 동해의 큰 용이 돼 왜적으로부터 동해를 지키겠으며, 인도식으로 화장해 장례를 검소하게 치르라는 유언에 따라 대왕의 유해를 화장, 이곳 동해의 대석상에 매장했다고 전해진다.
이 능은 육지에서 약 19.8m 떨어져 길이 약 2백m의 바위섬으로 내부에 동서남북으로 십자수로가 나 있다. 바위섬 가운데는 조그만 수중못을 이루고 있으며 그 안에 길이 3.6m, 폭 2.85m , 두께 0.9m 크기의 거북모양 화강암이 놓여 있어 그 속이 화장한 유골을 봉안한 납골처로 추측된다. 단, 화장을 해서 재를 뿌렸느냐 유골을 직접 모셔 놓았느냐에 대해서는 아직 학자들 간에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한편 대왕암이 화장한 문무대왕의 유골을 뿌린 산골처라는 이설도 있지만 이곳은 죽어서도 나라를 지키겠다는 문무대왕의 숭고한 호국정신이 깃들어 있는 곳이다. 이러한 수중왕릉은 세계에서도 유례가 없는 특이한 것으로 사적 제 158호로 지정돼 있다.

문무대왕릉 해돋이

바다 한 가운데의 수중릉 위로 붉게 떠오르는 태양의 모습에서 문무왕의 숭고한 호국 정신이 언제나 살아 숨쉬는 듯하다.
일출을 보고 있노라면, 푸른 바다와 붉은 해의 정열적 조화가 가슴깊이 새겨지며 새로운 다짐을 하게 한다. 붉게 물든 파도의 일렁이는 모습에 마음속 일상의 근심이 하나 둘 사라져 자연과 하나가 되는 느낌이다. 여름, 겨울 할 것 없이 일출의 모습이 장관이다. 또한 이 곳에서는 신성한 문무왕릉이 있어 무속신앙인 굿이 많이 행해져 또 하나의 볼거리가 된다.

기림사

석가모니가 생전에 제자들과 함께 활동하던 승원 중에서 첫손에 꼽히는 것이 죽림정사와 기원정사다.
특히 기원정사는 깨달음을 얻은 석가모니가 20년이 넘게 머무른 곳이다. 이와 더불어 불자들의 수행도 점차 유랑위주에서 정착으로 바뀌었고 정사도 점차 수를 늘리게 된다. 그 기원정사의 숲을 기림(祇林)이라 하니 경주 함월산의 기림사는 그런 연유에서 붙은 이름이다.
기림사는 광복 전만 하더라도 이 일대에서는 가장 큰 절로 불국사를 말사(末寺)로 거느릴 정도였으나 교통이 불편한데다 불국사가 대대적으로 개발됨에 따라 사세가 역전 돼 지금은 거꾸로 불국사의 말사로 있다.
신라에 불교가 전해진 직후 천축국의 승려 광유가 오백명의 제자를 교화한 임정사였다는 설화도 있고 그 뒤 선덕여왕(善德女王)20년 서기 643년에 원효대사(元曉大師)가 도량을 확장하면서 기림사로 개명하였다는 설도 있지만 분명치가 않다.
삼국유사에서 “신라 31대 신문왕(神文王)이 동해에서 용으로 화한 선왕으로부터 만파식적이라는 피리를 얻어 가지고 왕궁으로 돌아가는 길에 기림사 서편 시냇가에서 잠시 쉬어갔다”는 기록을 살펴보면, 최소한 통일신라 초기인 신문왕 이전부터 기림사란 절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할 수가 있다.
조선시대에 와서는 철종(哲宗) 14년 1863에 대화재로 주요 건물이 불탔으나 경주 부윤(府尹) 송우화(宋迂和)가 크게 시주해 다시 지었다.

감포항

감포는 달감(甘)자 꼴의 지형과 감은사(感恩寺)가 있는 포구라 하여 감은포(感恩浦)라 한데서 유래됐다.
일제 암흑기 시절 호랑이 말살정책이 있을 때 마지막으로 잡힌 곳이 감포에서 경주로 넘어가는 추령재로 그 곳 지명은 지금도 범골이다. 지명에서 유래하듯 이곳 감포는 문무대왕의 수중왕릉 대왕암이 있고 또 부왕의 뜻을 받들어 모시고자 신문왕이 서기 682년에 건립한 감은사가 있다. 또한 문무왕이 용이 돼 나타난 것을 바라다 본 곳으로 유명한 이견대(利見臺)가 모두 감포읍 대본리에 연접해 있어 문화유적을 답사하기에도 좋은 곳이다.
한편 과거의 역사가 찬란했다면 지금의 감포항은 채낚기로 잡아 올린 오징어와 문어, 새우 등의 위판(僞版)이 한창이다. 매일 새벽을 가르는 위판장의 시끌벅적함과 힘차게 파닥이는 생선들만 보고도 여행객들이 탄성을 지르기 예사. 재래시장의 넉넉함도 느껴볼 수 있어 기분 좋아지게 하는 곳이다.

봉길해수욕장

동해로 흐르는 대종천의 하구에 자리한 이 봉길해수욕장은 백사장 길이 5백m, 폭 40m로 개장때 평균 수온 22℃ 내외로 더운 여름 피서지로 적격이다. 해수욕과 하천에서의 피서를 함께 할 수 있으며, 문무대왕 해중릉인 대왕암과 가까워 동해안 역사 문화유적 관광을 겸한 피서지로 각광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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