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수협 50년, 어업인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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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수협 50년, 어업인의 날
  • 윤창훈
  • 승인 2012.03.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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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만화 수협 수산경제연구원장

어업인을 위한 새로운 희망의 이름인 수협은 지난 1962년 4월1일 대한수산중앙회가 있던 건물에서 ‘수산업협동조합중앙회’의 현판식과 함께 이 땅에 탄생했다.
출발 당시 113만 8325명의 어민 조직체로서 협동조합의 지상목표는 '어민부강(漁民富强) 수산개발(水産開發)'이었다. 수협 창립을 뒷받침하는 수협법은 국가재건최고회의 상임위원회에서 1962년 1월 19일 의결되어 1월 20일 법률 제1013호로 제정 공포되었으며, 그해 4월 1일자로 시행됐다. 중앙회를 구성하는 회원 수협도 (지구별 어협 86개, 업종별 어협 11개, 수산제조업조합 2개 등 99개 조합) 이 날 동시에 탄생했다.
탄생 당시의 수산 현실은 비참했다. 1961년을 기준으로 어선 1척당 어업생산량은 9.8t에 불과했고 어업인 1인당 소득은 762원으로 국민 1인당 평균소득수준의 3분의 1에 지나지 않았다. 1960년대 초반 우리 어촌은 궁핍함의 상징이었고, 어업인들은 가난의 대명사였다. 이처럼 어촌경제가 극도로 열악한 만큼 어업인과 수산업을 살릴 남다른 과제를 안고 탄생한 수협에 대한 기대는 높을 수밖에 없었다.
수협은 수산업의 후진성과 어촌경제의 빈곤을 초래한 가장 큰 원인이 수산물의 유통과 수산금융을 장악하여 고리대금업으로 어업인을 착취하는 객주에 있다고 보았다. 객주퇴치를 위해 수협은 이들 세력이 왕성한 지역에 위판사업을 벌였다. 수협을 통해 전통적으로 수산업부문에 기생해 온 객주세력은 존재기반을 잃게 되었고 어업인은 경제적 수탈에서 해방되었다. 이처럼 면세유류 공급, 100억 자체자금 조성운동, 상호금융사업, 공제사업, 해태수출, 어업통신사업, 군납사업 등 수협의 사업은 하나같이 저절로 된 것은 없었다.
오늘의 수협은 자랑스런 선배들의 투쟁의 역사로 가능했다고 본다. 조지 오웰은 “바로 우리 코 앞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제대로 알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끊임없이 투쟁해야 한다”고 했다. 이에 따라 역사가 주는 순결한 상상력을 조직의 아이디어로 활용코자 ‘수협인물사’를 발간하기도 했다. 이 책에서 선배님의 어업인에 대한 봉사와 수협의 사업에 대한 투쟁의 교훈을 깊이 간직하고 수협의 자긍심과 정체성을 발견했다.
21세기에는 시야를 세계로 넓혀 한국수협 50년 역사의 지혜를 오늘의 관점에서 분석하고 미래를 전망한 ‘한국수협의 KSP’를 발행해 세계의 호응을 얻었다. 지속가능한 미래 세계수산을 위해서는 각국의 경험과 전문성의 공유가 필요하다는 인식하에 세계수협의 날을 제정했다. 채택된 어업인을 위한 수협인의 행동강령은 무한 봉사의 지도가 되었으며 2011년에는 협동조합의 노벨상이라고 불리는 명예로운 로치데일 파이오니어 상도 아시아권에서는 처음으로 수상했다.
이제 창립 50주년을 맞이한 수협은 성숙한 만큼 어촌사회에 책임 있는 자세로 공헌함과 아울러 어업인의 아픔을 함께 나누고 희망을 주는 위대한 수협으로 탈바꿈해야 한다. 어업인의 날 부활 첫 해를 맞아 우리는 어업인을 위한 새로운 역사를 창조함은 물론 어업인의 눈물을 닦아 주어야 할 임무도 동시에 가져야 한다. 이 임무는 정찬우 시인이 ‘존재의 의미’에서 말한 “당신”을 “어업인”으로 바꾸어 부르는데서 완성된다고 본다.
언제부터인가/어업인은 내 곁에 있었습니다/그리고 나를 도리깨질 쳤습니다. 어느 날인가는/어업인을 아니 사랑할 수 없도록/마구잡이로 흔들어 놓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순간/어업인 없인 내 존재의 의미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웬일일까요/어업인은 오직 하나 내 사랑이니까요.
오는 4월 1일 수협 탄생50년과 같이하는 어업인의 날 부활은 수협과 어업인이 상호공존함으로서 ‘위대한 수협, 행복한 어업인’으로 재탄생돼야만 그 역사적 의의가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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