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검한 마을제에서 축제문화로 승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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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검한 마을제에서 축제문화로 승화
  • 김용진
  • 승인 2004.01.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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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안의 빼어난 절경속에 해맞이와 해넘이를 함께하는 전북 부안군 위도. 이 섬은 고슴도치 형상을 닮았다고 해서 위도(蝟島)로 불린다. 12Km나 되는 섬 해안선을 따라 한바퀴를 돌아보면 가히 환상적이다. 태양이 푸른 바다속으로 빨려드는 저녁노을이 질때의 낙조광경은 더 더욱 그렇다. 여느 섬과는 달리 산들이 병풍처럼 둘러싸 분지를 이루고 있어 해안풍경이 그저 그만이다.
섬부변해역은 한때 칠산조기어장으로 유명세를 톡톡히 치렀으나 지금은 서해안 최대의 김양식장으로 탈바꿈했다. 어업인들은 띠뱃놀이가 주민 단합과 화합을 도모하는 것은 물론 이처럼 풍요로운 어장을 보존하고 외부의 도적을 막기위해 크게 기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위도 띠뱃놀이는 전북 부안군 위도면 대리마을에서 전승되고 있는 마을 굿이다. 이 마을굿은 당산굿, 원당굿, 용왕굿, 산신제의 다중적 제의와 굿 놀이로 이루어져 있다. 위도 띠뱃놀이 정차는 무녀가 주재하는 원당굿과 용왕굿으로 구분된다. 또한 마을에서 선출된 제관과 마을 풍물패들이 연행 주체가 된다. 도서지역 풍어를 기원하는 이 띠뱃놀이는 언제부터 유래됐는지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없다. 위도는 변산반도 격포항에서 14km 떨어져 조기가 많이 잡히던 시절에는 波市(파시)로 성황을 이루었던 곳이다. 칠산어장을 옆에 끼고있는 위도주민들은 종전에는 선주들 비용으로 풍어와 안녕을 기원하는 대규모 별신굿을 벌이기도 했으나 약 50여 년 전부터 별신굿이 끊기고 최근엔 매년 풍어를 기원하고 제액을 쫓는무당굿 중심의 띠뱃놀이가 전승되고 있다.
조기잡이가 쇠퇴하면서 굿이 끊기고 해적행위가 자주 발생하자 이도곤이라는 대리 마을이장이 띠뱃굿을 줄다리기와 함께 부활시킨 것이 오늘날 띠뱃놀이를 전승하게 된 계기가 된 것이다. 위도 띠뱃굿이 널리 알려진 것은 1978년 제19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마을 주민들이 출전해 대통령상을 수상하면서 세인의 관심을 끌었다. 그후 1985년에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면서 마을주민들의 전통문화유산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자부심을 갖게 된 것이다. 이에 1980년 위도 띠뱃놀이 보존회를 결성하고 이 고장 어촌민속에 대한 전통과 원형보존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 것이다.
위도 띠뱃놀이의 연행 과정은 (1)마을회의→(2)장보기→(3)제물장만→(4)뱃고사→(5)원당행→(6)동편당산굿→(7)원당제→(8)작은당제→(9)동편용왕제→(10)동편당산굿→(11)주산돌기→(12)서편당산굿→(13)서편용왕제→(14)용왕제→(15)줄밥/가래밥 뿌리기→(16)띠배 띄워보내기→(17)도제(산신제) 등의 순이다.

최근 마을굿 준비과정이 간소화됐을뿐 아니라 대한 관념도 가 종전처럼 엄격하지 않은 측면도 있다. 그것은 준비과정이 가졌던 종교적 의미가 과거만큼 큰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해마다 정월 초사흗날 펼치는 원당제를 비롯, 주산돌기와 용왕제를 마친후 띠배를 띄워보내는 띠뱃놀이의 행사의 절정에 도달한다. 원당(願堂)은 대리마을 당제봉 정상에 자리잡고 있다. 바다 쪽으로 절벽을 이룬 이 당제봉 위에 세워진 원당은 어업인들이 모든 소원을 빌고 그 소원을 잘 이루어 준다는 전설을 지니고 있다. 파시때는 수많은 어선들이 왕래했으며 어선들도 원당 앞을 지날 때제(祭)를 올렸는데 영험이 많다는 소문이 나돌고있다. 산중턱 바다를 내려다 보고있는 곳에 망루처럼 맛배지붕 2칸 기와집으로 건조된 원당은 낮은 돌담으로 쌓여져 있다. 바다 쪽 담장은 절벽 끝에 닿아 있다. 담장 안 10여평의 공간에 농악대와 선주 등 20여명이 참여한다.
위도 띠뱃놀이는 이렇게 시작된다. 정월 초사흗날 아침 무녀와 화주, 원화장, 부화장, 농악대 등이 먼저 나와 농악을 요란하게 울리면, 부락민들은 오색 뱃기를 든 선주들과 모여 원당을 향해 산에 오른다. 원당에는 무녀와 부정한 일을 저지르지 않은 선주 각 어선 화장 등 마을 남성들만이 모여든다. 원당제의는 마을의 제액을 쫓고 풍어를 기원할 뿐 아니라 주민들의 무병장수와 복을 축원하는 무당굿이다. 굿거리는 성주굿, 산신굿, 손님굿, 지신굿, 서낭굿1(원당․본당서낭), 서낭굿2(애기씨 서낭), 서낭굿3(장군서낭), 깃굿, 문지기굿 순서로 진행된다. 성주굿은 마을 사람들의 명과 복과 풍어를 빌며 소원성취를 축원하고, 산신굿은 산신과 마을 평안과 복을 빈다. 손님굿은 강남국의 손님을 달래주고 복을 기원하는 굿이다. 지신굿은 터주신을 위하고 부(富)를 축원하는 굿이고, 원당부인․본당부인 서낭굿은 원당․본당서낭을 위해 각 지역 서낭을 불러모시고 마을 유지와 인사들을 축복하는 제의다. 애기씨 서낭굿은 어린아이들의 수명장수와 복을 축원하며, 장군서낭굿은 풍어를 기원한다.
깃굿은 원당제 가운데 가장 핵심적인 굿이다. 각 선주들이 한해동안 자기 배에 모실 서낭을 내림받는 굿이기 때문이다. 무녀가 "원당 서낭님을 받을 건가" 물으면 "예, 원당 서낭님을 받을랍니다"라고 대답한다. 그러면 무녀는 선주의 손바닥에 산쌀을 몇 알 집어주는데, 짝수가 되면 그 서낭과 연분이 돼 내림을 받고 홀수가 되면 그 서낭을 받지 못하고 다른 서낭을 같은 방법으로 내림 받는다. 산쌀이 계속 홀수가 되면 짝수가 될 때까지 다른 서낭을 받는다. 선주의 손바닥에 놓인 산쌀이 짝수가 돼 서낭이 내려지면 그 서낭 이름을 한지에 적어주는데, 이것을 깃손이라고 하며, 이 깃손을 뱃기 꼭대기에 묶는데 이것을 ‘깃손받기’라고 한다. 깃굿은 일명 선주굿이라 부른다.

원당제가 끝나면 화주, 원화장, 무녀, 독축관, 농악대, 뱃기 순서로 내려온다. 내려올 때쯤은 이미 원당에서 술을 많이 마셨기 때문에 농악 위주로 흥겨운 분위기가 감돈다. 지게를 짊어진 원화장은 춤을 추면서 일부러 넘어져 구르기도 하면서 흥을 고조시킨다. 내려올 때도 중간의 작은 당(堂)에서 둥글게 모여 한바탕 농악을 울리고 춤을 추며, 그 때 제관은 한지에 산 당밥(밤, 곶감, 대추 등)을 묻고 마을동쪽 바닷가 용왕바위 위에서 한지에 싼 용왕밥을 바다 아래로 던진 후 바다쪽을 향해 허리를 굽혀 절을 한다. 이 용왕바위는 대리마을 용왕제이다.
제주들이 당에가서 제를 모시는 동안 마을 주민들은 바닷가에 띠배를 준비하고 용주제(龍王祭)를 시작한다. 이행사의 특색은 마을 부녀자들이 고깔을 쓰고 장구, 징, 소고 등을 치며 농악대를 이루어 흥겹게 노는가 하면 탈을 쓴 여인이 나와 함께 추기도 한다.
원당제 일행이 용왕밥 던지기와 주산돌기를 한 후 마을로 돌아오면 대개 만조가 된다. 용왕제는 무당이 중심이 돼 마을 액을 제거하고 바다 원혼을 달래며 풍어를 비는 절차이다. 무녀는 바닷가 띠배 옆에 용왕상을 차리고 바다를 향해 굿을 한다. 이때 부녀자들은 악기 소리를 죽이고 춤만 춘다.
용왕제를 하는 동안 한쪽 옆에서는 바다 쪽을 향해 가래질소리, 술배소리, 애용소리 등을 목이 터져라 부르고, 또 한쪽에서는 춤을 추며 떠들고 웃기도 한다. 해가 서편에 기울 무렵 용왕굿이 끝나면, 무녀는 용왕상 제물들을 조금씩 떼어 함지에 담아 섞은 후 바다에 ‘줄밥과 가래밥’을 뿌린다. 무녀가 앞장서고 풍물패와 부녀자들이 뒤따라간다. 무녀가 줄밥을 바가지로 퍼서 바다에 뿌리면서 ‘가래질소리’, ‘술배소리’를 선창하면 풍물패가 풍물을 울리며 뒤따르고, 상쇠와 그 뒤의 부녀자들이 그 노래의 뒷소리를 받는다.
‘줄밥과 가래밥 뿌리기’가 끝 나면, 드디어 띠배를 바다에 내리고 이 띠배를 끌고 갈 모선에 끈으로 연결해 묶는다. 이 모선에 띠뱃놀이 가래질 소리, 술배소리, 애용소리, 배치기 소리 등을 부를 몇 사람과 오폭기를 든 화장들, 풍물패들이 올라탄다. 풍물패는 풍물을 울리고, ‘배치기소리’ 선창자가 ‘닻캐라! 돛달어라! 노저어라!’를 외치며 ‘배치기 소리’로 흥을 고조시킨다. 이어 술배소리, 애용소리, 가래질 소리를 반복하며 띠배를 이끌고 바다로 나아간다.
띠뱃놀이는 전 과정 중에서 가장 화려한 장관을 이룬다. 띠배가 마을의 모든 잡신과 제액을 싣고 낙조를 받으며 칠산바다로 멀어져 갈 때, 마을 사람들은 모두 바닷가에 서서 경건한 마음으로 합장하거나 절을 한다. 띠배를 끌고 가는 모선 좌우로는 4~5척 정도의 호위선이 오색뱃기를 휘날리며 바다위를 질주하면서 마을의 모든 잡귀를 날려보낸다. 이미 바다에 어둠이 깃든다. 위도 때뱃놀이는 본래 제의적 뜻이 강한 마을굿이었다. 섬사람들에게 삶의 위기란 육지 노동과 달리 바다에서 조업도중 당할 수 있는 사고나 죽음과 같은 것이다. 띠뱃놀이는 이런 위험 요소들로부터 삶을 지키기 위해 제의 속에 종교적 상징들을 마련하고 그 상징들의 힘에 의해 그 굿을 일군다. 이러한 변화는 마을굿의 명칭 변화에서도 나타나 본래 정월 초사흗날 마을 제만(제사) 모시’가 띠뱃놀이의 전신으로 볼 수 있다. 현재 널리 알려진 위도 띠뱃놀이는 1978년 전국민속예술경여내회에 출연하기 위해 마을굿 연행을 재구성하면서 붙인 명칭이다. 마을 제사를 놀이로 부르는 것에 대해 일부 마을 사람은 거부감을 보이지만 마을 주민들에게 이 명칭을 받아들이는 것은 제의에서 놀이문화로 변화를 수용했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과거엔 부정이 있을지 모르는 외지인 출입도 엄격히 제한했으나 최근에는 외지인 출입을 개방하는 쪽으로 변모해가고 있다. 외지에서 오는 사람은 대개 띠뱃놀이에 관심이 있는 일반인, 방송국 기자나 촬영가들, 관련 전공 학자들과 학생들이다. 띠뱃놀이에 참여하는 외지인들은 띠뱃놀이 관중으로서 하나의 층을 형성하게 됐는데 이런 현상은 전통문화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확산된 데 따른 것으로 보인다. 위도 띠뱃놀이 행사가 있는 날에는 섬이 방문객들로 붐빈다. 대리마을 주민들도 외지인들을 배척하지 않고 축제에 참여한 모든 이들을 성심껏 대접하며 잔치를 베푸는 것도 변화된 세상을 수용한 것으로 풀이된다. 띠뱃놀이에 외지인들을 위한 특별한 연행과정은 없지만 외지인 참여는 띠뱃놀이를 마을 축제로 승화시키는 중요 요인으로 작용하고 지속적으로 이어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될 것으로 믿고 있다. 따라서 기능보유자들에 대한 정부의 배려가 시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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