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양산업인 미역양식도 노력하기 나름...김동만 미역양식어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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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양산업인 미역양식도 노력하기 나름...김동만 미역양식어업인
  • 김용진
  • 승인 2005.09.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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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조류에 속하는 미역은 바다를 정화시키는 환경의 파수꾼이다. 또한 가장 강력한 알카리성 식품이기도 하다. 쌀 1백40g의 산도를 미역 2.2g만 있으면 충분히 중화시킬 정도로 쌀을 주식으로 하는 한국인들의 영양섭취에 균형을 잡아주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미역은 산후조절용으로 알려진 것도 바로 이런 이유가 가장 큰 것으로 꼽힌다. 그래서 1960년대 후반부터 일기 시작한 미역양식은 가난한 어촌에 부(富)를 안겨주는 큰 소득원이었다. 하지만 1990년대 중반이후 값싼 중국산이 밀려들면서 미역양식은 사양산업으로 전락, 여기에 매달리던 양식어업인들이 어촌을 떠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 김동만(金東萬․53)씨는 25년동안 수산업에서 손을 떼지않고 고집스럽게 미역품질향상과 가공미역 개발을 서두르는 등 지금도 생산과 가공에 전념하고 있다.

수산업에 관한한 박사로 통해

전남 고흥군 풍양면 앞바다는 인근 보성만과 순천만 사이에 자리잡고 있다. 이곳 미역양식업은 지난 1980년대 초부터 개발돼 최근엔 전국 생산량의 40%에 이르는 연간 9만5천t을 거둬들여 국내 유통을 좌우하고 있다.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아버지를 따라 어선을 탄 김씨는 졸업 후에는 아예 어선어업을 직업으로 삼았다.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가장 노릇을 하는 가운데 인근에 있던 교회가 운영하는 야간 고등공민학교에서 주경야독으로 향학열을 불태우기도 했다. 그는 어선어업 뿐 아니라 김 과 미역 양식 등 군 입대하기까지 닥치는 대로 수산업을 경험했다. 1980년대 초 군대를 마치고 곧바로 김 양식업에 매달렸다. 그 이듬해에는 관내에서 처음 부류식양식업을 도입, 개척정신을 발휘했다. 물론 미역양식도 함께 했다. 이처럼 김씨의 실제 수산업에 종사한 기간은 40여년이 넘는다. 그 결과 지금은 어선 4.18t짜리 1척과 과 1t 미만 2척을 비롯, 미역 양식장 1백ha 미역가공공장 7백 평 전복양식장 2백 평 등을 관리하는 경영자로 우뚝 섰다.

그러나 지난 1986년 어업인후계자로 선정된 후 1988년부터 서서히 사양화되는 미역양식에 오히려 미래가 있다고 확신하고 품종개량과 함께 미역가공업에 나선 것이다. 그의 어업인후계자가 지원은 정부가 몇푼 지급하는 지원금보다 미래 어촌 지도자가 되겠다는 굳은 신념에서 비롯된 것이다. 미역양식에 전념한 그는 지난 1990년 중반까지 연간 8천만~1억 원까지 소득을 올리기도 했다. 지난 1994년 단순양식으로는 더 이상 소득을 올릴 수 없다고 판단, 어촌계 사업으로 2ha의 전복투석사업, 30ha의 꼬막 살포사업을 벌이는 등 사업다각화를 꾀했다.

미역양식의 새로 도전과 실패
고흥지역의 미역양식은 연작여파로 나날이 노후화돼 생산량이 점점 떨어진데다 해마다 생산이 넘치면서 가격마저 하락돼 새로운 양식방안이 절실한 실정에 이르렀다. 이러한 상황을 타개한 것도 역시 김씨였다. 먼저 어촌계원들을 설득, 지난 1994년 전국에서 처음으로 시도된 어장재배치 환경개선 등 어장정비사업을 어촌계 스스로 서둘렀다. 이 결과 생산성 향상은 물론 전국에서 고흥 미역이 좋다는 소문도 이때부터 퍼져나갔다. 김씨는 그간 단순히 마른미역이나 염장미역을 가공, 시중에 내다 팔 경우 노력에 비해 얻는 소득이 생산비도 안된다는 것을 깨닫고 가공미역사업에 주력할 정도로 다시 도전장을 내밀었다. '죽기 아니면 까무라치기'식으로 밀어붙였다.

이를 위해 1999년 중순부터 2000년 초까지 1억 원을 들여 7백 평 규모의 가공공장을 건립하고 마른 실미역과 썰은 미역 등을 만들어 시중에 직접 출하하거나 이것이 여의치않으면 중간가공공장에 넘겨주는 등 온갖 몸부림을 쳤다. 그 결과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둬 마을주민들에게 일거리를 맡겨 주었을 뿐만 아니라 상당한 소득도 올렸다. 하지만 이러한 가공사업은 순탄치 않았다. 중간가공공장과 kg당 9백씩 원 받기로 계약을 맺었지만 재고량이 늘어나면 덤핌판매를 해야하기 때문에 kg당 5백~6백 원도 안되는 경우가 태반이었고 심지어 중간가공공장에서는 판매가 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대금지불을 미루는 등 부작용이 속출했다.

심지어 일꾼들의 임금도 제때 주지못하는 등 어려움이 뒤따랐다. 미역산업에 불굴의 투지를 갖고 노력한 끝에 그에게는 '미역박사'란 별명이 붙어다녔다. 그러나 중국산 미역이 들어오면서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1ha당 1백20만~1백50만 원에 이르던 소득이 2000년을 기점으로 50만 원 정도로 뚝 떨어지면서 큰 시련까지 겪어야만 했다. 게다가 2001, 2002년 사이 중간가공공장에 밀어준 미역원료대금 3억 원을 찾기 위해 소송까지 벌였으나 결국 한 푼도 받지 못한 액운이 겹쳤다. 김씨는 이에 굴하지 않고 오뚝이처럼 일어나 다시 양식품목을 일반줄기 미역에서 부산 기장 쇄 미역으로 품종을 바꾸고 생미역 유통으로 전환한 것이다.

마지막 승부는 유통이다.

그는 순수한 국내 미역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유통체계 확립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4년 전부터 쇄미역 생산에 전념하고 있다. 더불어 가공미역 생산도 중단, 운영비를 절감하는 등 생산과 판매에 전력을 쏟고 있다. 또 생산방법도 크게 바꾸었다. 다른 양식어업인들은 대게 12월부터 다음해 4월까지 수확하지만 이보다 빠른 11월 초순부터 생산에 들어가 원초를 25kg단위로 묶어 마대에 넣어 수산시장이 아닌 서울 가락동 청과시장과 청량리와 영등포시장 등 전문 중도매인에게 현찰로 출하 하는 방식을 택했다. 생미역은 수산시장에서 거래되지 않기 때문이다.

또 생산시기에는 미역을 구입하려는 중간상인과 소비자들의 신뢰도를 높이기 위해 궂은 날씨에도 쉬지 않고 일정물량을 채취, 나름대로 수급을 조절했다. 이 결과 2003년에는 25kg들이 한 포대에 3천5백~4천 원, 지난해에는 4천5백~5천 원까지 가격이 형성돼 꽤 짭잘한 재미를 보기도 했다. 그러나 생산어가 보호와 미역가격을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국내산과 중국산을 차별화해야 한다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열을 올렸다. 중국산이 마른미역 기준, 매년 4천9백 여t이 반입되는데도 이들 대부분이 국내산으로 둔갑 판매되기 때문에 생산자의 피해는 이만저만 아니기 때문이다. 중국에서 수입되는 값싼 염장미역은 가공공장으로 흘러들어 이곳에서 다시 마른 줄기미역으로 재가공된후 국내산과 섞여 국내산으로 시중에 공급되기 때문에 국내산 미역이 설자리를 잃고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중국산 때문에 3천 평(1ha)의 생산고가 50만 원으로 생산비 2백만 원은 고사하고 인건비도 건지지 못하는 실정이다. 따라서 2년전부터 미역생산자협회장을 맡고있는 김씨는 우선 중국산 반입물량에 대한 철저한 원산지 표시와 함께 제도적으로 이를 관리할 것을 주문하고 있다. 또 생산자협회에서도 지자체관계자와 어업인 수산물품질검사원과 합동으로 내륙지 도매시장과 유사도매시장 및 할인점과 백화점 등 소비지에 대한 유통실태조사를 벌이는 방안도 검토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더불어 일선수협에서는 물김 수매와 같이 미역에 대해서도 산지 수매제도를 도입해 원산지 관리와 물량 수급조절 등 새로운 유통체계를 다져 줄 것을 호소한다.

부인도 동참하는 힘에 용기 얻어

지난 1986년 4월 어업인후계자로 선정된 김씨는 다양한 사회활동을 펼치고 있다. 그의 직함에는 2010년 해양엑스포 유치위원을 비롯, 고흥군수협 이사 고흥군 제2건국 위원 군 수산조정위원 적조대책 위원 어장정화정비사업 추진위원 해수부 명예어업감시자 한수연중앙연합회수석부회장 등이 빽백하게 적혀있다. 이같은 직함 때문에 한수연중앙연합회와 해수부 군 회의 등 각종 간담회와 세미나 등에 참석해야 하는 날이 적지않다. 지난 1998년 국가어항 풍양항 개발사업 유치와 개발에도 적극 참여, 다기능어항의 면모를 갖추는데도 정열을 쏟았다. 하지만 각종 회의 때문에 어장관리 등 해야 할 일은 절대 소홀히 하지 않는다. 회의에 참석하는 날이면 새벽 3시부터 어장에 나가야 하고 회의가 끝나면 곧 바로 어장으로 향하는 일벌레다.

이처럼 어촌지도자로 지역봉사자로 어업경영자로 노력할 수 있는 것은 부인 김혜숙(김혜숙.00)씨가 버티고 있기 때문이라고 그는 말한다. 김씨는 어촌에서 부인들의 역할이 막중할 뿐 아니라 산업역군이란 점을 감안, 이들에게 표창제도를 도입, 격려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아울러 수산업경영인은 어촌개척의 선구자로 지역의 봉사자로 헌신해야 한다면서 외국의 선진기술 습득과 선진지 견학 등 자기개발을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해서는 안된다고 역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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