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도는 외롭지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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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는 외롭지않다
  • 남달성
  • 승인 2003.08.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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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릉군소속 어업지도선 경북 202호(27톤․ 선장 서영철․徐泳哲․46)가 독도를 향해 저동항을 떠난 것은 지난 5일 아침 6시. 대체로 파도는 잔잔했으나 사위(四圍)가 짙은 안개로 깔려 지척의 촛대바위가 가물거릴 정도. 그러나 차석홍(車錫洪)수협중앙회장을 비롯한 기자단과 조합장 일행 20여명은 새벽잠에서 깨어나 독도를 난생 처음 들른다는 흥분에 휩싸여 완전무장(?)한채 한사람의 낙오자도 없이 예정시간에 승선할 수 있었다. 바람 한점없는 저동항을 미끄러지듯 빠져나온 어업지도선은 시속 13.5노트로 항진, 대양을 가르며 급피치를 올렸다.

무변대해(無邊大海)속의 독도는 울릉도에서 동남쪽 90km, 육지부 경북 울진에서 동북쪽 1백25km나 떨어져있는 외딴섬이다. 자산도 우산도 삼봉도 등으로 불려온 이 섬이 독도란 이름으로 고정된 것은 1906년. 당시 심흥택(沈興澤)울릉군수가 외부로 보낸 문서에 첫 기재한 것이 계기였다. 그러나 일본은 송도(松島) 또는 다케시마(竹島) 등으로 오랫동안 불러왔다. 이렇듯 한․일간의 독도영유권분쟁은 끝이 없었다. 따라서 지난 99년 1월 발효된 신 한․일어업협정에는 독도를 양국간 중간수역에 넣음으로써 굴복외교란 국민의 지탄을 면치못했다.

이같은 역사를 지닌 독도에 기자가 첫 발을 디딘 것은 이날 오전 9시50분. 지난 97년 11월 해양수산부가 사업비 1백77억원을 들여 새로 축조한 길이 80m되는 주부두에 뛰어 오른것이다. 기자뿐 아니라 일행들도 다소 상기된 표정이었다. 독도관광은 자신의 의지도 필요하지만 날씨가 협조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기자 역시 그동안 3번의 시도를 했지만 번번이 실패를 거듭했다. 일행들도 마찬가지였다. 독도를 사수하는 경비대원들이 일행을 반겨주었다. 경관좋은 곳을 배경으로 저마다 촬영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독도는 아무나 올 수 없는 곳이기에 모두들 그런가보다.

이렇듯 독도는 외롭지않다. 경비대원들은 2개월마다 교대근무한다. 외부와의 단절을 최소화하기 위한 방편이다. 그러나 요즘같은 여름철엔 관광객맞이에 여념이 없다. 박광민(朴洸民 ․22)경비대장은 “8월 한달동안 예약된 관광객만도 4백여명에 달한다”며 “이들이 독도를 찾을때가 가장 즐겁다”고 말했다. 독도를 지키는 것은 육상경찰뿐 아니다. 해양경찰도 한몫 톡톡히 하고있다. 실제로 이날 독도 남쪽 3.8마일해상에는 5천톤급 해경 5001함 상봉호가 웅좌를 드러내고 있었다. “너희들 올테면 오라”는 식의 위용을 과시하고 있었다.

또 하늘에서도 영공을 지키는 최신형 헬기가 떠 광역해상경비체제에 들어갔다. 이 헬기는 상봉호에서 하루 한두차례 초계경비에 나서기도 한다. 해경은 선박의 해난사고발생때 경비함에 탑재된 헬기를 사고해역에 먼저 보내 현장상황을 모(母)경비함에 연락, 긴급구조활동을 벌인다는 전략이다. 그래서 독도는 한반도 육지부를 경비하는 어떤 경비체제보다 더 튼실할 정도다. 가수 정광태(鄭光泰)의 ‘울릉도 동남쪽 뱃길따라 2백리 외로운 섬하나 새들의 고향 …’이 아니더라도 누가 감히 독도를 자기땅이라고 주장하겠는가.

그러나 정부는 지금까지 독도지킴이에 대해 방관자 자세를 보이고있다. 그 첫째가 1948년 6월 미군기의 느닷없는 폭격으로 당시 독도주변에서 미역과 해삼 전복을 채취하던 어업인들이 부지기수로 숨져갔으나 여지껏 아무런 대책을 세우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와중에 지난 99년 9월 6.25전란 당시 미군의 노근리양민학살사건이 표면화되자 이같은 사실이 만천하에 알려진 것이다. 생존자 장학상(張學相․90)씨는 “미군기 12대가 서도 물골근처에서 동도쪽으로 융단폭격, 수십명이 사살되는 되는 등 금새 아수라장으로 급변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그러나 지난 95년 6월 독도연구회가 조사한 결과 당시 많은 어업인들이 민간인을 표시하는 흰옷을 흔들기도 했으나 막무가내로 포격했을뿐 아니라 사망자도 무려 3백여명에 달한다고 보고하고있다. 그럼에도 불구, 정부가 진상규명과 함께 아무런 보상을 하지 않는 것은 국민의 권리를 봉쇄하는 것과 다를 바 없지않은가. 또 지난 1954년 8.15를 맞아 독도등대에 불을 밝히고 자체경비에 나선 독도의용수비대 33명에 대해 정부는 팔짱만 끼고있다. 이들은 53년 6월25일부터 28일까지 3차례에 걸쳐 미군기를 도용, 독도에 세운 우리어부 위령비를 파괴하고 일본영토표지를 하는 등 불법행위를 자행한 일본인들을 쫓아낸 것이다.

또 수비기간에도 수차례 격전도 벌였다. 이처럼 독도들 지켜온 많은 민간인들이 정당한 대우를 못받고있는 것이다. 지난 13일 위안부출신 할머니와 강제징용자 등 일제 강점시기에 피해를 입은 3백여명이 국적포기서를 정부에 제출했다. 최봉태(崔鳳泰)태평양전쟁 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공동집행위원장은 “희생자들이 정부의 무관심에 항의하기 위해 대한민국 국민이기를 포기하고 이에따른 불이익도 감수하겠다고 결의한 것은 서글픈 현상”이라며 “지금도 늦지않으니 정부가 최선책을 강구할 것”을 권고하고있다. 정부는 독도를 지켜온 수많은 영령들을 위해 무언가 성의를 보여야 할때가 온 것 같다. <南達成기자 tsn2020@kore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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