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인생 2막 어촌 이야기] 김영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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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인생 2막 어촌 이야기] 김영곤
  • 한국수산경제
  • 승인 2021.07.19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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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가 없어도 양식장이 없어도 나는 행복한 귀어업인입니다”

마을에서는 그를 보통 ‘팀장님’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팀원은 없다. 가끔 ‘목사님’이라 부르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그는 이제 교회 밖에서 일한다. 친한 이들은 편하게 ‘삼촌’이라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오히려 그가 조카뻘이다. 충남 태안군 안면읍으로 귀어한 김영곤 씨를 부르는 마을 사람들의 다양한 호칭은 그 자체로 그의 정체성을 나타낸다. 40년 목회자의 삶을 정리하고 고향 마을로 귀어한 김영곤 씨의 조금은 특별한 귀어 스토리를 만나본다.

효도를 위한 귀어 선택
안면도는 우리나라에서 여섯 번째로 큰 섬이다. 태안반도 허리춤에서 남쪽으로 뻗은 남면반도 남쪽 끝에 자리해 있다. 본래는 육지였는데 조선시대 삼남지방의 세곡을 편하게 실어 나르려 바닷길을 내면서 오늘날 같은 섬이 됐다. 
안면도에서 만난 김영곤 씨의 첫인상은 ‘수줍은 새색시’ 같았다. 섬 ‘이름처럼 편하게 쉬고 있는(安眠)’ 모습이라고 해야 할까. 듣는 순간 마음이 편안해지는 차분한 목소리와 온화한 얼굴에서 귀어 전에는 어떤 일을 했을지 먼저 궁금증이 일었다.
“귀어하기 전까지는 수원과 안산에서 목회자로 활동했습니다. 전도사 때부터 목사 생활까지 합치면 40년쯤 되겠네요.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목사도 정년이 있습니다. 70세가 정년이죠.”
그러나 2018년 귀어 당시 영곤 씨의 나이는 60세였다. 정년을 10년이나 남기고 조기 퇴직을 한 셈이다.
“저는 이곳 안면도가 고향입니다. 아버지는 벌써 30년 전에 소천하시고 어머니 홀로 고향에 남아 계셨죠. 아흔을 바라보는 어머니를 더는 홀로 계시게 할 수 없었습니다. 목사의 정년은 누군가 일흔 살로 정해놨지만, 제가 반드시 그것을 채울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마침 열심히 하는 후배 목사가 있어서 제가 담임목사로 있던 교회를 넘겨주고, 저는 어머니를 모시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집안의 넷째로 자란 영곤 씨는 중학교 졸업 후 태안을 떠나 줄곧 객지 생활을 했다. 워낙 어릴 때 떠났기에 고향 마을에는 친구 하나 없었다. 하지만 그는 어머니를 위해 고향으로 돌아왔고, 고향으로 돌아오기 위해 귀어를 선택했다.
“저는 교회 안에서만 살았기에 세상일을 잘 모릅니다. 투자할 자본도 없고, 내세울 재주도 하나 없어요. 남들처럼 바다나 낚시를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몸을 쓰는 일은 더더욱 익숙지 않습니다. 딱 한 가지, 건강은 좀 타고난 것 같아요. 그런데 저 같은 사람도 바다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있더군요.”
영곤 씨의 고향인 태안읍은 바지락과 굴이 유명하다. 바지락이나 굴 채취는 특별한 면허나 허가를 받지 않고도 할 수 있는 ‘신고어업’에 속하기 때문에 영곤 씨는 귀어 결정에 큰 부담을 느끼지 않았다. 큰 배를 사야 하거나 드넓은 양식장을 운영해야 했다면 영곤 씨는 결코 귀어를 선택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바지락과 굴 채취, 그리고 바다환경지킴이
맨손어업으로 귀어한 김영곤 씨는 3월에서 10월까지는 바지락을, 11월부터 2월까지는 굴을 채취한다. 혼자서 하는 작업이 아닌 마을 공동작업이다. 마을 주민 전체가 똑같은 날짜를 정해 똑같은 시간에 나갔다가 똑같이 들어온다.
“조개 잡는 일이 별것 아닌 것처럼 보여도 해보면 꽤 힘이 듭니다. 쪼그려 앉아 있는 것도 힘들고 일어서면 허리도 아파요. 저는 아직 갯벌에 익숙하지 않다 보니 걷는 것도 힘들고, 잡은 조개를 끌어 나르는 것도 힘들어요. 하지만 꽤 재미있어요.”
아직 채취작업에 숙달되지 않은 영곤 씨의 수확량은 마을 주민들과 견주어 한참 모자라지만, 바다를 오고 가는 과정에서만큼은 마을 어르신들에게 큰 힘이 된다고 한다. 자신의 트럭으로 갯벌을 오고 가는 어르신들을 태워드리고, 수확한 바지락이나 굴도 트럭에 실어드린다. 조개잡이는 국가대표급이지만, 정작 평지를 걷는 건 불편해하는 어르신들이 꽤 많기 때문이다.
“저는 이 마을에 와서 모든 게 새롭습니다. 저는 그동안 교회에서 사람들에게 ‘말씀’으로 도움을 드렸는데, 귀어를 하고 나서는 ‘몸’으로 도움을 드리고 있어요. 그런데 결국은 똑같은 것 같습니다. 도와드릴 수 있다는 사실이 그저 감사할 뿐이죠. 목회 생활을 하면서 틈틈이 산악자전거로 체력을 유지해온 것이 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마을에서 영곤 씨의 공식적인 직함은 ‘시설팀장’이다. 마을의 공공건물과 체험학교를 관리하고 유지·보수하는 일, 외부 손님 안내, 차량 운전 등 온갖 허드렛일을 마다하지 않는다.
올해 4월부터는 바다환경지킴이 일도 시작했다. 주 5일, 마을 해안가와 인근 무인도 다섯 곳을 돌면서 해양쓰레기를 수거해 집하장으로 옮기는 일이다.
“무인도에는 바다에 떠다니던 쓰레기가 많이 밀려옵니다. 가만히 내버려두면 쓰레기산이 될 정도예요. 비가 오지 않으면 평일은 날마다 해안과 섬을 돌면서 쓰레기를 수거합니다.”
2017년 아무런 자본금도 융자금도 없이 맨몸으로 귀어한 영곤 씨는 바다환경지킴이 일을 하기 위해 귀어 후 처음으로 투자도 했다. 무인도를 신속히 돌기 위해 650만 원짜리 보트를 구입하고, 수거한 쓰레기를 집하장으로 옮기기 위해 1.5톤 트럭도 장만했다. 1.5톤 트럭은 마을 일을 위해서도 톡톡히 쓰이고 있다.


“귀어인도 투잡족이 될 수 있어요”
1958년생인 영곤 씨는 안면읍 중장마을에서는 그래도 젊은 축에 속한다. 올해 아흔한 살이 된 노모를 모시고 있으면서, 마을의 다른 연로한 어르신도 부모처럼 대한다.
“귀어를 하겠다고 고향 마을에 왔지만, 제가 살던 안산에서 이곳으로 주소지를 정식으로 옮기기까지는 석 달이 걸렸어요. 날마다 넥타이를 매다가 작업복을 입고, 리어카를 끌고, 쓰레기를 줍고, 갯벌에 가면 어디가 눈인지 코인지도 모르게 일을 한다는 게 처음엔 쉽게 적응되지 않았습니다.”
영곤 씨는 ‘내가 앞으로도 이 생활을 꾸준히 감당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해봤다고 한다. 그 순간 목회자 시절 자신이 신도들에게 자주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것은 바로 ‘봉사하는 삶을 살자’는 것이었다. 작은 시골마을이었지만 봉사할 일을 찾다 보니 끝이 없었다.
“저는 오늘도 이웃집에 가서 고구마 심고, 어제는 다른 집에서 마늘을 뽑아드렸습니다. 저는 이렇게 결심했어요. 우리 마을의 어느 집이든 내가 한 번은 가서 하루 종일 무료로 봉사해드리자고 말이죠. 그렇게 마을 어르신들을 도와드리다 보니 점점 칭찬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낯선 시골살이에도 용기가 생겨났어요. 칭찬을 듣고 그분들과 같이 공감대를 형성하니까 정신적으로 엄청난 위로와 힘이 됐습니다.”
김영곤 씨의 귀어 사례는 많은 투자금이 없어도, 융자를 받지 않아도 어촌에서 살아갈 수 있다는 본보기를 보여준다. 귀어를 한다고 해서 배를 사서 어선어업을 하거나, 면허를 받아 양식장을 하거나, 시설물을 구입해 비즈니스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어촌에는 고기를 잡는 사람도 필요하고, 잡은 고기를 파는 사람도 필요하지만, 고기가 살아가는 환경을 가꾸는 사람도 당연히 필요하다. 
영곤 씨와 같은 투잡족이 될 수도 있다. 영곤 씨는 “비록 수입이 아주 많은 건 아니지만 나처럼 4대 보험이 되는 귀어업인이 어디 흔하겠냐”면서, “자신과 같은 방법이 가장 안전한 귀어가 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여기 와서 어르신들과 대화를 많이 하다 보니 평생 안 하던 사투리가 생겼습니다. 저는 아직 여러모로 부족합니다. 근데 아직 젊다 보니까 어르신들이 마냥 사랑을 나눠주시는 것 같습니다. 열심히 살면서 다 보답해드리려고요.”
배시시 웃는 영곤 씨의 모습이 마치 소년 같다. 앞으로의 계획을 묻자 영곤 씨는 짧게 답했다. 그의 대답은 ‘좋은 사람’이었다.

<자료 제공=한국어촌어항공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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