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어업유산의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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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어업유산의 가치
  • 한국수산경제
  • 승인 2020.08.03 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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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김 양식과 전남
일제강점기에 김 양식의 주산지는 전남의 완도, 고흥, 장흥, 광양, 여수, 진도, 무안 등 남해안의 중심 지역이었다. 특히 완도가 전남의 50%, 장흥과 고흥을 포함할 경우 80%를 점했다. 
이처럼 전남, 특히 완도 지방에서 김 양식이 성행할 수 있었던 것은 첫째, 자연환경으로 적당한 간만 차, 염분의 변화가 없고 파도가 낮고 좋은 조류 유통, 그리고 비가 많고 결빙이 없었던 점 둘째, 비교적 소자본과 가족노동을 주체로 한 부업적 성격 때문에 반농반어 지역인 전남 남해안에서 김 양식이 활발하게 이뤄졌다.
8·15 광복 이후에도 해조류 양식어업의 중심은 전남 지역으로 전국 양식 면적의 85% 이상을 점유했다. 양식 김은 전남 다도해 일대가 주산지였으며 이외에 경남, 전북, 충북의 일부 해역에서 양식됐다. 일본으로의 수출량이 증가하고 있어 수출 전망이 좋았기 때문에 김 양식은 해마다 늘어나는 추세를 보였다. 1960년대 김 수출은 수협중앙회에서 모두 수집해 공매하는 방식을 취했다. 특히 김은 일본시장에 의존하고 있는 관계로 일본의 김 수입 정책에 따라 국내 김 판매가격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60년대 후반 일본은 자국 생산자 보호 차원에서 한국 김 수입을 적극 억제하는 정책을 취하면서 수출가격이 크게 하락해 김 파동을 겪기도 했다. 1970년대 이후 1980년대까지 김 양식은 매우 호황을 누렸다. 완도의 경우 김 양식이 지역경제를 지탱하는 중요한 소득원이었다. 1990년대에도 전남은 전국에서 김 양식 비중이 가장 높았으며 완도 지역은 전남 지역 생산량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전남의 김이 대부분 일본에서 수출됐던 상황에 비춰본다면 일본 수출의 어려움은 김 주산지인 지역경제의 어려움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현재도 총량적 수출 실적 증가에도 불구하고 지역경제의 김 양식 의존도는 계속 떨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2절 유산적 가치
1. 전통 기술의 변화와 발전

김 양식은 일제강점기부터 지속됐다. 일제강점기의 김 양식은 하동, 돌산, 광양, 곤양의 4개 지역에서 성행했는데 특히 광양군은 연안 곳곳에서 양식이 이뤄져 생산고가 전국에서 수위를 차지했다. 당시 양식장은 조상 대대로 전승돼 논과 밭, 임야의 경우와 같이 배타적 점유권을 가졌다. 김 양식이 가장 호황을 누리던 시기는 1960년대와 1970년대 초에 이르는 10여 년이다. 당시 김 양식을 가장 많이 했던 완도 지역은 김을 일본으로 수출했으며, 지역경제도 호황을 누렸다. 호황기에는 “개들도 천 원짜리 지폐를 물고 다닌다”고 할 정도로 경기가 좋았다. 하지만 이러한 호황은 김 양식 시설의 밀식, 과점, 무면허로 이어지면서 완도 내해 청정해역을 황폐화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 결과 품질이 떨어지고 갯병도 걸려서 일본 상인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후 완도 바다가 노후화돼 김 양식 대신에 전복 양식, 다시마와 미역 양식으로 전환했다. 최근 김 양식은 전남의 해남, 진도, 충남의 서천으로 확대됐다. 양식방법은 시설에 따라 섶홍, 죽홍, 지주식, 부류식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섶홍은 싸리나무, 솜대, 대나무 등 거칠게 늘어진 나무를 이용했다. 양식어업인들은 매년 6~7월경에 재료를 구입해 몇 개의 가지를 묶어 다발을 만든다. 그리고 9~10월경에는 만조 시 양식장으로 운반해두고 기다렸다가 간조 시 갯벌에 세운다. 조류와 기온 등 해양환경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12월부터 다음 해 3월에 걸쳐서 채취한다.  

<자료 제공=수협중앙회 수산경제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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