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관
해태, 감태, 청태라고 하는 김은 신라시대부터 먹기 시작했다고 전한다. 김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해의’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이 책에 김은 홍주, 서천, 태안, 광양, 영광, 장흥, 나주, 영암, 진도, 강진, 해남, 순천, 보성, 고흥, 광양, 하동 등 46개 고을의 토산품으로 소개돼 있다. 1424년 만들어진 <경상도지리지>에도 울산, 동래, 영일 등지에서 해의가 생산된다고 기록돼 있다. 해태라는 명칭은 정약용이 강진 유배지에서 쓴 <경세유표>에서 처음 사용됐다. 이 책에서는 “해태는 감곽 또는 감태라고 하는데, 태는 여러 종류가 있어서 그중 자태는 속말로 해의라 하고 사투리로 ‘짐’이라 한다”고 설명했다.
해태 혹의 해의가 ‘김’으로 불리기 시작한 사연도 있다. 광양 김이 특산품으로 왕실에 바쳐졌는데, 하루는 왕이 광양 김으로 맛있게 수라를 마친 후 음식의 이름을 물었으나 아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한 신하가 “광양 땅에 김 아무개가 만든 음식입니다” 하고 아뢰자, 임금이 “그럼 앞으로 이 바다풀을 그 사람의 이름을 따서 ‘김’이라고 부르도록 하라”고 해서 김이 되었다고 전해온다. 광양 태인도에서는 그 어부가 김여익으로 알려져 있다. 또 1966년 <가락월보> 1월호에는 “해태를 김이라 한 것은 우리 선조 여익 할아버지가 태인도에서 해의 양식법을 창안해 그 생산품을 하동장에 내다 팔 때 이것이 태인도 김가가 기른 것이다”라고 하는 것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기록돼 있다.
1714년 광양현감을 지낸 허담은 김 양식을 처음 시도한 김여익을 추모하고 김 양식 보급에 대한 업적을 기린 비문을 짓고 비석을 세웠다고 전한다. 아쉽게 비석은 없어지고 비문만 태인도에 있는 영모재에 전하고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인조(1623~1649) 시대에 전남 광양군 태인도에 김여익이라는 어부가 바다에 떠다니는 나무에 붙어 있는 것을 보고 지주를 세우 김을 처음으로 양식했다고 기록돼 있다. 전남 광양군 태인도에는 김 시식지 기념관과 기념탑이 세워져 있다. 김 시식지 기념관은 1987년 전남 지정기념물 제113호로 지정됐고, 이후 1992년에 김 시식 전시관이, 1999년에 용지마을 입구에 김 시식지 유래비가 건립됐다.
김은 우리나라 서·남해안, 제주도와 일본, 중국 등에 분포돼 있으며 17세기부터 김 채취가 시작됐다. 한일합방을 앞두고 일본은 조선의 각 해역에 대한 수산물을 수탈하기 위한 준비를 마쳤다.
1911년에는 남해안 일대를 중심으로 김 양식어장의 적지를 조사했다. 그 결과 김 양식의 적지로 전남 완도군, 장흥군, 고흥군, 광양군, 경남의 동래군, 하동군 등이 선정됐다.
일제가 제일 먼저 했던 것은 그곳에 해태조합을 만드는 일이었다, 일본의 어업자들의 이민을 추진하고 있었기 때문에 관행적으로 채취어업을 했던 것을 제도화하는 것이 필요했다. 게다가 동경대지진(1923년)으로 일본 김의 생산지였던 동경만의 양식어장이 감축돼 김 수요가 급증했다. 조선총독부는 1927년부터 10개년 계속사업으로 매년 4만2000엔을 지원해 김 생산을 독려했다. 그 결과 1942년 무렵 조선 양식어업의 95%를 김 양식이 차지했다.
1920년대 말 양식이 시작된 후 일본식 개량양식법이 보급됐다. 완도에 1922년 처음으로 해태어업조합이 설립돼 체계를 갖추기 시작했으며, 기술적으로는 1929년에 수산시험장에서 처음으로 부흥양식법이 개발됐다. 당시의 김 양식은 양식어업의 46%, 1932년에는 87%, 1842년에는 95%까지 차지할 정도로 비중이 높았다. 김 양식은 대부분 한국인에 의해서 진행됐고 일본인은 극히 소수였지만 양식 면적이나 양식량은 일본인이 한국인보다 훨씬 많았다.
<자료 제공=수협중앙회 수산경제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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