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 시를 만나다] 바다거북
상태바
[바다 시를 만나다] 바다거북
  • 한국수산경제
  • 승인 2020.02.24 08:4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바다거북

최금진

그는 수족관에 침몰선처럼 가라앉아 있었다
얼굴에 문신을 한 아랍인의 우울 같은 것이
주름살을 파들어가고 있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어, 유리를 들여다보며
뭔가를 말하려는 듯 앞발을 휘젓고 있었다
햇빛도 들지 않는 수족관에서
그는 알비노증에 걸린 사람처럼 등껍질 속으로 
자주 희멀건 얼굴을 숨겼다
여기서 나는 유일하게 살아남은 갑골문자야, 하지만
등껍질에 새겨진 세월의 이면은 점치지 못한다
한번도 깨진 적 없는
그는 몸을 벗어 던지려는 듯 한참을 끙끙거렸다
나는 신하도 하나 없는 왕이야, 그는
임금 王자가 새겨진 배를 유리에 문지르며
입을 뻐끔거렸다
오가는 사람들을 보나마다 다 안다는 듯
그의 시선은 유리벽 밖에까지 맺히지 못했다
짤막한 꼬리로 물속에 무수한 마침표를 찍으며
그는 그렇게 같은 자리를 맴돌고 있었다
등판에 펼쳐진 별자리판에서
제 운명의 슬픈 점괘 하나를 얻은 것처럼
알라, 알라, 코란을 읊는 것처럼 그는
자꾸 콘크리트 바닥에 몸을 끓어 앉히고 있었다

 

※ 최금진 작가는…
충북 제천 출생. 2001년 <창비> 등단. 시집 <새들의 역사> 등. 산문집 <나무 위에 새긴 이름>. 오장환문학상 등 수상.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