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 시를 만나다] 멸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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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시를 만나다] 멸치
  • 한국수산경제
  • 승인 2019.10.28 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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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청

내가 멸치였을 때,
바닷속 다시마 숲을 스쳐 다니며
멸치 떼로 사는 것이 좋았다.
멸치 옆에 멸치, 그 옆에 또 멸치,
세상은 멸치로 이룬 우주였다.
바닷속을 헤엄쳐 다니며
붉은 산호, 치밀한 뿌리 속을 스미는
바닷속 노을을 보는 게 좋았었다.

내가 멸치였을 땐
은빛 비늘이 시리게 빛났었다.
파르르 꼬리를 치며
날쌔게 달리곤 하였다.
싱싱한 날들의 어느 한 끝에서
별이 되리라 믿었다.
핏빛 동백꽃이 되리라 믿었었다.

멸치가 그물에 걸려 뭍으로 올려지고,
끓는 물에 담겼다가
채반에 건져져 건조장에 놓이고
어느 날, 멸치는 말라 비틀어진 건어물로 쌓였다.
그리고, 멸치는 실존의 식탁에서
머리가 뜯긴 채 고추장에 찍히거나,
끓는 냄비 속에서 우려내진 채
쓰레기통에 버려졌다.
 
내가 멸치였을 때,
별이 되리라 믿었던 적이 있었다.


※ 이건청 작가는…
경기도 이천 출생. 1967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등단. 시집 <반구대 암각화 앞에서>, <굴참나무 숲에서> 등. 한국시인협회 회장 역임. 한양대학교 명예교수, 현대문학상, 목월문학상 등 수상

<자료 제공=국립수산과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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